Tim Larson
Board Member

팀 라슨



I was born in Korea in 1964.  My birth mother was 16 years old and my father was a young medical worker with the United Nations.  Upon learning of her pregnancy my birth mother went to live with her Grandfather in the country.  I was raised by my birth mothers Grandfather until I was 2 years old. 

저는 1964년 한국에서 태어났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16살이었고 아버지는 UN의 젊은 의료진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임신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할아버지와 함께 지내기 위해 시골집으로 갔고 2살 때까지 어머니와 할아버지의 손에 자랐습니다. 

In 1966, I was sent to Holt orphanage in Seoul like most mixed race children who were born after the war, we were abandoned by nearly everyone: by our foreign birth fathers, who rarely remained in Korea; by our Korean birth mothers who endured ostracism and social stigma; and by the Korean government which endorsed a politics of racial purity and sought to expel mix-raced children from the public eye, hide us in orphanages and promote international adoption as a way to try and cover up the shame they felt. 

1966년에 저는 한국전쟁 후 태어난 대부분의 혼혈아들이 그러했듯이 서울의 홀트 보육원에 보내졌습니다. 우리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서 버려졌습니다; 한국에서 거의 머무르지 않았던 외국인 친아버지로부터 ; 외면과 사회적 낙인을 견뎌낸 한국의 친어머니로부터 ; 순수 혈통 정책을 지지하고, 사람들의 눈으로부터 혼혈아들을 퇴출시키기 위하여 우리를 고아원에 숨기고 그들의 부끄러움을 덮으려는 방법으로 국제 입양을 장려한 한국정부로부터. 

It was not until 1967 that interracial marriage was made legal by the US supreme court.  I have often wondered that if this ruling been made earlier, say before the war, would some of the US soldiers have actually married the Korean women they left behind? 

1967년 미국 대법원에 의해 합법화되기까지는 다른 인종간의 혼인은 불법이었습니다. 저는 자주 만약에 이 법이 더 일찍 만들어져서 전쟁 전에 알려졌다면 어땠을지 궁금해 했습니다. 미군 중 몇몇은 그들이 뒤에 남겨놓고 떠나버렸던 한국 여성들과 결혼 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1967 also happens to be the year that I was adopted by Pastor and Mrs. James Larson of Hood River Oregon.  My adoptive parents already had 5 biological children and were led to support Harry Holt’s mission of finding homes for Korean orphans based on their Christian faith.  I would become the first of 10 children my parents would eventually adopt of various races, ages and backgrounds.  I have always felt a deep gratitude for the sacrifices my adopted parents made to give me a new life.

1967년은 또한 오리건 주의 후드 리버에 있는 제임스 라슨 목사 부부에게 제가 입양된 해입니다. 저의 양부모님은 이미 5명의 친자녀가 있었고 그분들의 기독교 신앙에 근거하여 한국의 고아들에게 집을 찾아주려는 해리 홀트 여사의 사명에 후원을 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저의 부모님이 다양한 인종 나이, 배경에서 입양하려고 한 10명의 아이들 중 첫째가 되었습니다. 저는 입양으로 새 삶을 허락해 준 저의 양부모님의 희생적인 태도에 항상 깊은 감사를 느낍니다. 

Growing up in a mixed race family in the late 60s and early 70s in America was not without it’s challenges. We lived in a small town and to most people we are an oddity.  We were kind of a mash-up of the Brady Bunch and Guess who’s coming to Dinner.   I think generally, the fact my father was a fairly prominent pastor in the region made it more acceptable to most folks who were inclined to think we did not really belong.  We had to endure the requisite comments like “Where are you from?”, “North or South Korea?”, “Do you speak English?”, “Do you speak Korean?” “Do your parents have their own kids?” “You’re so lucky your parents saved you”. “You don’t look Korean” and so on. I was on the receiving end of a lot of racism – name-calling and exclusion. Neither my ethnicity, nor my heritage, were reflected in the way I grew up. I felt I didn't belong anywhere.

60년대와 70년대 초에 미국에서 혼혈로써 자란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작은 마을에 살았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우리는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약간 Brady Bunch(유명한 미국시트콤 : 단란한 가정이라는 의미)와 Guess who's coming to Dinner(초대받지 않은 손님)를 섞어 놓은 것 같았습니다. 제 생각에 저의 아버지가 지역에서 꽤 중요한 목사였다는 사실이 우리가 이 지역사회에 속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쉬운 대부분의 시골 사람들에게 우리의 존재를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너는 어디서 왔니?”, “남한이니 북한이니?”, “영어는 하니?”. “한국어 할 줄 알아?”, “너의 부모님은 친자녀들도 있니?”, “부모님이 너를 구해주셔서 넌 참 행운아구나”, “한국인 같이 안보인다“ 등 과 같은 질문들을 견뎌내야만 했습니다. 저는 이름을 부르고 제외 시켜 버리는 등의 수많은 인종차별을 받고 있었습니다. 저의 민족성이나 사회적 유산 어떤 것도 제가 자라나는 데에 반영되지 않았고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This perceived isolation was my main psychological challenge growing up.  I was always searching to find some kind of connection to an ethnic identity and to some extent cultural identity.  My parents meant well and did their very best but lacked an understanding of the importance of ethnic identity. My parents, like many of this era felt that a loving family, faith in God and “being an American” was all that was needed and fitting in was simply a matter of conformity and socialization.   I remember the big celebration we had around my US citizenship.  I was officially American in nationality…but not in ethnicity.  I certainly felt American since I knew nothing else but I was constantly reminded that I did not look American.  I also lacked a connection to my Korean ethnicity since I was mixed race.  The comment I heard often, that I did not look Korean always stuck with me because being Korean was the thing I craved the most. If I did not look Korean and I did not look American, what was I?   

이렇게 받아들여진 고립감은 저의 성장의 주된 정신적 고통 이었습니다. 항상 제가 어느 인종 정체성과 어떤 문화적 정체성의 범위와 관련이 있는지 찾아보았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잘대해 주셨고 최선을 다해서 저를 길러주셨지만 인종 정체성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해가 부족하셨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그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미국인이라는 것” 이 가족을 사랑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이라고 여기셨고, 적응하는 것은 단순히 순종과 사회화의 문제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저는 제가 미국 시민권 취득을 할 무렵 열었던 큰 축하파티를 기억합니다. 저는 법적으로 미국국적을 취득했지만 인종적으로는 아니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를 때에는 확실히 나는 미국인이라고 느꼈지만 계속해서 제 자신이 미국인처럼 안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혼혈인이기 때문에 한국인이라는 정체성도 부족했습니다. 한국인처럼 안 생겼다는 말을 종종 들었는데 한국인이 되는 것이 제가 가장 바라던 것이었기 때문에 그 말은 늘 저에게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만약 제가 한국인처럼 생기지도 미국인처럼도 생기지도 않았다면 저는 무엇이었을까요? 

I consciously hid my resentment and bitterness because I felt sincerely grateful to my parents and did not want them to think they had somehow failed.  Only occasionally did this chip on my shoulder boil to the surface but for the most part I was successful in repressing these feelings.  I think most people would tell you that I appeared like a pretty well-adjusted kid. 

저는 저의 슬픔과 비통함을 의식적으로 숨겼습니다. 저의 부모님께 정말 감사했고 어떻게든 부모님이 (양육에)실패했다는 생각을 갖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주 가끔씩 이런 감정이 밖으로 표출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이런 감정들을 잘 누르면서 지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가 심리적으로 안정된 것처럼 보였다고 말할 겁니다. 

I was fortunate enough to have had older adopted brothers who were also mixed race Koreans.  My brothers helped give me confidence in who I was and made me proud of being Asian but I still felt ethnically disconnected.  My brothers were adopted at an older age and had suffered through tremendous hardships as mixed race orphans in Korea.  They both spoke fluent Korean and I was always jealous that they could have “secret” conversations.  Neither of them looked Korean so it was amusing to see the surprise on the faces of other Koreans when they spoke.  They were both very tough kids having survived living on the streets of Korea.  There we many times that they came to my defense growing up.  They were both Black Belts in Taekwondo and in the Larson house…everybody was Kung-fu fighting.  Their tough guy reputations served me well growing up and was enough to make a few would-be bullies think twice about starting fights or using racial slurs.  

저에겐 저보다 먼저 입양된 혼혈 한국인 형들이 있어서 참 운이 좋았습니다. 형들은 제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자신감을 가지라고 도와주었고 아시안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인종적으로는 단절을 느낍니다. 형들은 늦은 나이에 입양이 되었는데 한국에서 혼혈인 고아라는 이유로 엄청난 고난을 겪었습니다. 형들은 모두 한국말을 잘했는데 저는 형들이 “비밀스런” 대화를 할 수 있던 것이 항상 부러웠습니다. 형들은 모두 한국의 길거리 삶에서 살아남은 거친 아이들이었습니다. 제가 자라면서 저를 보호해주기 위해 형들이 와준 때가 많았습니다. 형들은 태권도 검은 띠이었고 라슨 가에서는 모두가 쿵푸를 했습니다. 형들이 터프가이라는 소문은 제가 자라는데 큰 도움이 되었고 약한 아이들을 괴롭히려는 아이들이 싸움을 걸거나 인종차별적인 욕을 하는데 두 번 생각하게끔 했습니다. 

There were very few Asian role models during my formative years, besides Bruce Lee and Sulu from Star Trek.  Most people thought I was Mexican and for a long time I was offended by that. I had my own brief moments of a racial superiority, learned from a conditioning that in the racial pecking order Asians may not be better than whites but surely we were superior to Mexicans. Shameful and ironic for a kid lacking in racial identity.  I have since embraced my “otherness” and am proud to be mistaken for being Hispanic, Filipino, Indian, etc. 

제가 자라던 시절에는 이소룡이나 스타트렉에 나오는 술루 외에는 아시안 롤 모델이 거의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가 멕시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오랫동안 저는 그것으로 공격받았습니다. 제가 인종간 우월성에 대해 느낀 순간이 있는데, 인종 간 사회 서열 순위에서 아시안은 백인보다는 못하지만 확실히 멕시칸 보다는 낫다는 사회조건에서 배웠습니다. 인종 정체성이 결여되어 있는 아이에게는 (이러한 사실이) 부끄럽고 아이러니합니다. 저는 저의 “다름”을 받아들인 후로는 히스패닉, 필리피노, 인디안 등으로 잘못 알아봐도 당당 합니다. 

The tipping point for me came in 1983 when I was able to visit Korea for the first time.  I was 17 and participated in one of the original Holt sponsored “Motherland tours”.  This visit to Korea and the relationships I made with other Korean adoptees would change my life forever.  I gained a deeper appreciation for the identity struggles of others and this became a common bond with many of my new found friends.  I was also able to discover some details about my birth Mother and the circumstances around my brief time as an orphan.  While I did not have any memories of Korea as a child, going back was hauntingly familiar to me.  My time in Korea and my fellowship with other adoptees was a revelation.  I gained a new self-confidence and self-esteem.  My feelings of ethnic displacement were replaced by feelings of belonging and inclusion.  I belonged with this group.  These were my people.  My tribe. 

저의 티핑 포인트(균형을 깨뜨리는 극적인 변화의 시점)는 1983년 처음으로 한국에 방문할 수 있던 때입니다. 저는 17살이었고 홀트가 후원한 “고국방문 여행”에 참여했습니다. 이때의 한국 방문과 그 때 다른 한국입양인들과의 관계가 제 삶을 완전히 바꾸어놓았습니다. 다른 이들과 싸우던 정체성에 대해서도 깊은 감사가 생겼고 이것으로 새롭게 알게 된 많은 친구들과 공통의 유대감이 형성되었습니다. 저는 또 친모에 대한 세부 정보를 발견 할 수 있었고 고아로 있던 때의 제 상황도 알 수 있었습니다. 어린아이로써 한국의 어떤 기억도 없었지만 돌아가는 순간은 제게 있어 잊을 수 없이 친숙했습니다. 한국에서의 시간과 다른 입양인들 과의 교제는 하나의 계시였습니다. 인종적 상실의 감정들은 소속과 포용의 감정으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이 그룹에 속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내 사람, 나의 민족입니다. 

Once I returned from Korea I started volunteering as a camp counselor for Holt’s Korean Heritage camps.  These camps were designed to help adopted kids connect to their ethnicity and build relationships within the community of adoptees. I have formed life-long bonds with these kids and with the other adoptees from both the heritage camps and from the heritage tours.

한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저는 홀트의 코리안 헤리티지 캠프에서 상담가로 자원봉사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런 캠프들은 입양된 아이들이 자신의 민족성에 연결되고 입양인 들의 커뮤니티 내에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기획되었습니다. 저는 그 캠프와 투어에서 이런 아이들과 다른 입양인 들과 평생 동안 결속되는 끈을 만들었습니다. 

It was from this connection to the Holt that I met Julie, Tami, Katy, Kim and Anita…all amazing women who make up the board of Love Beyond the Orphanage.  We all share a common vision to support our brothers and sisters who remain in Korea, who have aged out of the orphanages without being adopted and who now face enormous challenges to transition into independent life. 

홀트와의 이러한 관계 속에서 줄리, 타미, 케이티 그리고 아니타를 만났습니다. 모두가 Love Beyond the Orphanage의 이사회를 이루고 있는 훌륭한 여성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한국에 남아 입양되지 못하고 보육원에서 나가게 되어 이제 독립이라는 엄청나게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우리의 형제들과 자매들을 후원하기 위한 비전을 나누고 있습니다.

It has been a long journey to turn that adolescent chip on my shoulder into a spirt of gratitude. I have my community of adopted friends and family to thank for this.

어깨를 짓누르던 청소년기의 부스러기들이 감사의 표출로 바뀌기 까지는 오랜 여정이 걸렸습니다. 저는 이것에 대해 입양인 친구들 모임과 가족에게 감사합니다.

In 2002, my wife, my two sons and I traveled back to Korea to bring home our adopted daughter Emily.  Our family is now complete and we are so grateful for her.  She will grow up knowing who she is from the very beginning surrounded by her tribe of adopted Korean aunts and uncles. 

2002년에 저는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입양한 딸 에밀리를 데리러 한국에 갔습니다. 우리 가족은 이제 완성되었고 딸에게도 너무 고맙습니다. 에밀리는 입양인 삼촌들과 이모들 공동체에 둘러싸여 아주 처음부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가며 자랄 것입니다. 

As I look to the future, I am hopeful that attitudes of Korean acceptance for orphans will change and that adult orphans will be fully accepted and not ostracized or shunned.  I will continue to work toward helping to change hearts and minds though education and leadership.   I am very proud to be on the board of Love beyond the Orphanage. 

미래를 바라보면, 저는 고아들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태도가 바뀌게 되고 성인고아들이 상실이나 소외당하지 않고 완전히 받아들여지게 될 것으로 희망하고 있습니다. 저는 교육과 리더십을 통해 마음과 생각이 바뀌도록 돕는 일을 계속 할 것입니다. 저는 Love Beyond the Orphanage의 이사가 된 것이 매우 자랑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