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ra’s Story

로라의 이야기

In my childhood, I was one of the five oldest of twenty-six children.  But, despite my role as a big sister, I could not offer anything to my youngsters.  I was mostly quiet, and lived at Soo Pool Won, Isabell orphanage, until I dropped out of high school.  After dropping out of high school, I had to leave the orphanage.  Then at 18 years old, I had to look for a job which offered room and board.  My first job was working at a hair salon.  It was not in their interest to teach me the skills I needed, instead, my work was strictly limited to sweeping, cleaning, and tending the mail.  Only then was I rewarded with supper.

어린 시절 나는 스물여섯 명의 보육원 동기 중에 다섯 번째로 나이가 많았다. 하지만 내 역할은 큰 언니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동생들에게 어떤 것도 해줄 수가 없었다. 나는 대부분 조용했고, 수풀원(Isabell orphanage 이사벨 보육원)에서 고등학교를 중퇴 할 때까지 살았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나서는 보육시설에서 나와야 했으며 18살에는 숙식을 제공하는 직업을 찾아야 했다. 첫 직업은 미용실이었다. 그러나 내가 필요한 것을 가르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고 대신에 내 일은 걸레질, 청소, 그리고 우편물 정리하는 것 등 극히 제한적이었다. 그때 내가 받았던 것은 간단한 저녁 식사뿐이었다.

During the time I was single, I never obtained skill as a hairdresser, and ended up changing jobs several times between factory and restaurant work.  At my job at the factory, an acquaintance suggested I consider meeting a man through a matchmaker.  Thinking it would lessen my loneliness if I started my own family, I agreed to it.  Soon after, I was married in 1986, and that was the beginning point of yet another chapter of my misery.

혼자 지내는 동안, 미용사로써의 기술은 배울 수 없었고 공장과 음식점 등으로 직장을 여러 번 바꿨다. 공장에서 일할 때, 한 지인이 중매쟁이를 통해서 남자를 만나보라고 했다. 가족을 이룬다면 외로움이 덜할 거라는 생각에 그렇게 하자고 했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1986년에 결혼했고 그것은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었다.

I could not sustain the abused by my in-laws purely for the reason that I was an orphan.   Everyday, I thought of running away from this nightmare while I did not have a child. However, even if I wanted to run away, I had no one with whom I could seek refuge, so while I struggled with this harsh and abusive living situation, my son was born.  It became unbearable to see my son grow up watching my husband becoming an alcoholic.

The situation became so unbearable that I left home with my son and a  few necessities.  We lived with one of my orphanage younger sisters and her husband for six months and my son attended first grade.  I found a job closer to their apartment.  They were kind and generous to us, and I finally felt a sense of  ease.  After six months, my husband began repeatedly coming to my sister’s apartment drunk so often I finally had to leave her apartment and move back to my husband’s home. After two years, in 1995, my husband died of alcohol poisoning.  However, instead of feeling sadness and grief from his death, I felt neither.  

오로지 내가 고아라는 이유만으로 시댁식구들에게 학대당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아직 아이가 없던 때에는 매일매일 이 악몽과 같은 곳에서 탈출하는 것만을 생각했다. 그러나 만약에 도망간다고 해도 나를 도와줄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이 거친 학대의 삶 속에서 아들을 낳았다. 아들이 자라나며 아버지(남편)가 알콜 중독자가 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이 더 견디기 힘들어만 져서 나는 아들과 몇 가지 필요한 물건만 가지고 집을 나왔다. 보육원 동기인 동생과 그녀의 남편의 집에서 6개월 동안 살면서 아들은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했다.  나는 이 부부가 사는 아파트 가까운 곳에 직장을 구했다. 그 부부는 친절했고 마음이 넓었기에 나는 마침내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나 6개월 정도 지났을 때부터, 나의 남편은 술에 취한 채로 이 동생의 아파트에 계속해서 찾아왔고 끝내는 동생의 아파트에서 떠나 남편의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2년 뒤인 1995년 남편은 알코올 중독으로 죽었다. 그렇지만, 남편의 죽음에도 슬픔이나 비탄 같은 그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After his death, I immediately broke off of any ties with my in-laws, and finally ended their torment.  After that, my heart found peace, but because I no longer had a husband, I had to work twice as hard to support my son.  At times, my younger sister’s husband helped me by providing rice to sustain me and my son until my son was grown up.  He was so wonderful.  My son suffered a lot as a child, but he maintained a positive attitude all through high school. My son motivated me to work hard and live with a thankful heart even in harsh times.

남편이 죽고, 나는 바로 시댁과의 연을 끊어 버렸고 그들의 괴롭힘도 끝났다. 그 뒤, 나의 마음은 평안을 찾았지만 나는 더 이상 남편도 없었기 때문에 아들의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두 배 더 힘들게 일을 해야 했다. 그때에 보육원 동생의 남편은 아들이 다 자랄 때까지 아들과 내가 지낼 수 있도록 쌀을 제공해 주었다. 너무 고마운 사람이었다. 아들은 어린아이로선 겪기 힘든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긍정적인 태도를 가졌다. 아들은 내가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며 살 수 있는 삶의 이유였다.

My son had to drop out of college to support himself.  After doing temporary work for two years, he began a mandatory two years of military service.  After finishing his term, my son and I traveled to America during which I thoroughly enjoyed every moment and forgot all my hard labor.  People who we knew in America were so hospitable and kind to us that it made my trip so wonderful, and I felt more love than I could have imagined.  After returning from my amazing trip from America, as we settled back into our routine, my son suddenly brought up the subject of his interest in staying in America.  With my sole income, it was unthinkable to able to support him.

아들은 스스로의 생계 때문에 대학을 그만두어야 했다. 2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고 나서 2년 동안 국방의 의무를 다했다. 제대를 하고 아들과 나는 미국으로 여행을 갔는데 매순간순간이 너무 즐거웠고 힘들었던  나의 일들도 잊을 수 있었던 기간이었다. 미국에서 알게 된 사람들은 우리를 너무 환대해주고 친절히 대해줘서 그 여행이 너무 좋았고 내가 상상 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랑을 느꼈다. 너무나 좋았던 미국여행에서 돌아 온 뒤, 우리의 일상생활로 돌아왔을 때, 아들은 갑자기 미국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말을 꺼냈는데 나 혼자만의 수입으로 아들의 뒷바라지를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However, with his persistency of not giving up his interest in studying in America, I made the difficult decision.  In 2009, I decided to mortgage my apartment so he could study in the US.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미국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아들의 끊임없는 소원에 나는 어려운 결정을 했다.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을 받아 아들은 미국에서 공부 할 수 있게 되었다.

For the next three years, to support my son’s college tuition and living costs, I did not take a break from work.  I worked everyday, every night, and every weekend.  This harsh physical labor took toll on me, and because I did not take any days off, my body was showing a signs of stress.  I visited the medical clinic faithfully, and when I started to feel better, my son graduated with an associate degree in computer science.  Upon returning back from America, he got a job, and his job allowed him to travel to various locations overseas.  He gained much more knowledge, earned money, studied consistently, and obtained the hardest certificate of Cisco Certified Internetwork Expert. It was not easy, but because he understood my difficult situation, he pursued and obtained a position at an even better company.  To watch my son succeed, I am so amazed and so proud of him.  My life was harsh and difficult, but God gave me and my sisters a love that made it possible to overcome the pain that our circumstance inflicted on us. 

다음 3년간, 아들의 학비와 생계비를 보내기 위해 나는 쉼 없이 매일 낮, 매일 밤, 매주 주말에도 일했다. 이런 혹독한 노동은 나에게 안 좋은 영향을 주었고, 쉬지 않고 일했기 때문에 몸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병원을 꾸준히 다녔고 좀 나아지기 시작했을 때, 아들은 컴퓨터 공학 전문학사로 졸업했다.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아들은 직장을 얻었고 해외 여러 곳으로 출장이 잦았다. 아들은 훨씬 더 많은 지식, 돈을 얻었고, 계속 공부해서 제일 어려운 시스코 최고레벨 자격증을 땄다. 쉽지 않았지만 아들은 나의 어려운 상황을 알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노력했고 훨씬 더 좋은 회사에 취직했다. 아들의 성공을 지켜보면서, 너무 놀랍고 자랑스러웠다. 나의 삶은 가혹했고 어려웠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와 나의 동기들에게 고통스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랑을 주셨다.

I want to thank to the board members of Love Beyond the Orphanage for the opportunity to write my story. 

나의 이야기를 쓸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Love Beyond the Orphanage 이사회에 감사하다.

Lora

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