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s Journal

킴의 일기

My Adoption Journey in a Nutshell

간단히 보는 나의 입양 여정

My life journey began on May 8, 1967. Or not. My birthdate is a guesstimate. I celebrate on that date anyway because I love being alive.

내 삶의 여정은 1967년 5월 5일에 시작되었거나 그렇지 않다. 내 생일은 추측일 뿐이다. 내가 살아있음에 감사하기 때문에 어쨌든 이 날을 기념한다.

November is National Adoption Month. For 34 years of my life, I thought I was in an orphanage for 4 1/2 years. In 2006, I found out I was only in the orphanage for 3 1/2 years. This picture of me (left) was when I was a year old and admitted into the orphanage. I don't remember a thing about being in the orphanage and nothing was familiar when I visited my orphanage in 2006. I'm thankful for getting this picture because my first year of life is still a mystery.

11월은 나라에서 제정한 입양의 달이다. 내 인생의 34년 동안 나는 4년 반 동안 보육원에서 지냈다고 생각했다. 2006년에야 나는 3년 반만 고아원에서 지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왼쪽 사진은 내가 한 살 때이고 보육원으로 입원되었다. 보육원에서 지내던 때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고 2006년에 보육원에 방문했을 때 익숙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내 삶의 첫 해가 여전히 미스터리이기 때문에 이 사진을 얻게 된 것에 감사하다.

This picture is of me (middle) was taken a year after being in the orphanage. What a drastic change from my previous intake picture.

가운데 사진은 고아원에서 지낸지 일 년 뒤에 찍은 것이다. 이전의 사진에 비하면 엄청난 변화이다.

This is my picture when I was okayed for adoption (right). I was 4 1/2 years old. This is what prospective adoptive parents see when in the adoption process. Stay tuned for the rest of my journey, I know this hasn't been all that exciting but it all begins (four)*six months after this picture.

오른쪽 사진은 나의 입양이 통과되었을 때의 사진이다. 나는 4살 반이었다. 이것이 입양 절차가 진행 될 때 양부모로 예정된 분들이 본 사진이다. 나의 남은 여정으로 돌아가서 이야기 하자면,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이 사진(4살)의 6개월 후에 모든 일이 시작되었다.

 

Travel visa picture at 4 1/2 years old.

This is my travel visa picture. I was 4 1/2 years old and weighed 26 lbs. I have no memories of living in the orphanage for 3 1/2 years and I have no memories of traveling to Minnesota to be adopted. On September 2, 1971, I became Kimberly Sue Hansen. I don't remember much of this family, there were four other children besides me. I don't remember any family dinners. I don't remember any family outings. I don't remember any family members except for the mother; she was the one that had complete control over me because she was the abuser.

이것은 나의 여행비자 사진이다. 나는 4살 반이었고 무게는 26파운드 (11.8kg) 이었다. 3년 반 동안 고아원에서 지낸 기간의 기억도 미네소타로 입양되었을 때의 기억도 없다. 1971년 9월 2일 나는 킴벌리 수 핸슨이 되었다. 나는 이 가족에 대해서는 기억나질 않지만 4명의 다른 형제가 내 곁에 있었다. 어떤 가족 저녁 식사도 기억나지 않고 어떤 가족 나들이도 기억나지 않는다. 어머니가 학대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를 완전히 통제했고 그 어머니 외엔 기억나는 사람이 없다.

My days with this family were spent secluded in my bedroom. No toys to play with, no one to talk to. Locked pocket door leading to the kitchen and hallway door had a washcloth jammed up high so I couldn't reach it and I didn't have the strength to push it open. But, being locked in my room meant I was safe, until the washcloth was removed...maybe that's why I still love my bedroom the best. This little girl may be smiling but she was very good at pretending.

이 가족과 함께 한 나의 날들은 외딴 침실에서 보냈다. 갖고 놀 장난감도, 이야기 할 사람도 없었다. 부엌으로 가는 길에 있는 잠긴 미닫이문과 복도 문에는 행주로 높이 묶여있었는데 닿지 않았고 밀어서 문을 열 힘도 없었다. 내 방에 갇혔다는 것은 그 마른 행주가 치워지기 전까지는 내가 안전하다는 의미였다.. 아마 여전히 내가 나의 침실을 제일 사랑하는 것이 그 때문일 것이다. 이 작은 소녀는 웃고 있었지만 연기였다.

On a daily basis, every time I needed to go to the bathroom, I had to tell the mother. I would then need to walk in front of her down the hall and she would kick me in the back as I walked. I would fall down, get back up and this pattern continued until I reached the bathroom. November is National Adoption Month. The abuse continued to get worse. So many countless times I would be held by my ankles and slammed.

매일, 화장실에 가야 할 때마다 어머니에게 말해야 했다. 그리고 그녀 앞에서 복도 끝으로 가야 했는데 내가 걸을 때마다 그녀는 뒤에서 발로 걷어찼다. 나는 넘어졌고 다시 일어났다. 이런 행동은 내가 화장실에 갈 때까지 계속 반복되었다. 11월은 입양의 달이다. 학대는 계속 더 심해졌고 셀 수 없이 여러 번 발목이 붙잡혀 내동댕이쳐졌다.

There are a few times I remember being outside. One time I was on the back of my sibling's bike and my foot got caught in the spokes. Broken ankle meant I got a cast. Also meant I got a 'break' from the abuse, until the cast came off. I am now almost five years old in this picture and have been with this family for 7 months.

몇 번인가 밖에 있었던 때가 기억난다. 한번은 형제 중 누군가의 자전거 뒤에 탔는데 내 발이 바퀴살에 걸렸다. 발목이 부러졌다는 건 깁스를 했다는 말인데 이것은 깁스를 풀 때까지 학대로부터 ‘휴식’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사진 속에 나는 거의 5살이고 이 가족과는 거의 7달을 함께 지냈다.

One day, when I was locked in my room, I noticed the washcloth wasn't in the door. My heart jumped into my throat...at 5 years old, I had decided to run away.

내가 방에 갇혀있던 어느 날, 문에 행주가 묶여있지 않는 것을 알았다. 내 심장은 목구멍까지 뛰었다. 5살의 나이에 나는 도망쳐 나오기로 결심했다.

I listened intently for any noise or movement outside my door. The bottom drawer of the dresser contained my shoes. My feet were so swollen from the beatings that it was hard putting them on. I opened the door oh so quietly, listened again for movement. Nothing. How I made it out of the house I will never know. I felt like I had walked a gazillion miles until I found my hiding spot. I was found in the corner of my next door neighbor's garage...as my neighbor was holding me, all I could think was, please don't leave me in this house again! But she did and things got worse. I had thoroughly embarrassed the mother. She began whipping me on my back. To those adults that say whipping a defenseless child is for discipline sake and not abuse, let me tell you, IT. IS. ABUSE!

는 주의 깊게 방 바깥에서 나는 소리나 움직임을 주의 깊게 들어보았다. 내 신발은 옷장 맨 아래 서랍에는 넣어져 있었다. 내 발은 맞아서 많이 부어있었고 신발을 신기가 어려웠다. 나는 문을 아주 조용히 열고 움직이기 위해 다시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집을 나왔는지는 앞으로도 결코 모를 것이다. 나는 숨을 곳을 찾을 때까지 엄청난 거리를 걸은 기분이었는데 그러나 나는 바로 옆집에 사는 이웃의 차고 모퉁이에서 발견되었다... 이웃집 사람이 나를 데리고 있을 때 할 수 있었던 생각은 제발 나를 이 집에 다시 내버려 두지 말라는 것 이었다! 하지만 옆집 사람은 떠났고 상황은 더 안 좋아졌다. 내가 어머니를 무척이나 난처하게 했던 것이다. 그녀는 내 등에 채찍질하기 시작했다. 무방비의 아이를 때리며 학대가 아닌 훈계용이라고 말하는 어른들에게 말하는데 그것은 분명히 학대이다!

The hours upon hours and day after day of being locked in my room I could only think of one thing; when I 'get out' I will survive, no matter what. And I will have a family of my own, happily married with kids. For me, that was going to be my success story.
And my day finally came....freedom from this family! Somehow, I am still able to manage a smile at the age of 5 1/2.

시간이 흐르고 하루하루 날이 지나도록 내 방에서 갇혀 지내면서 오직 한 가지만 생각했다. 내가 이 집을 '나가는' 때가 되면 어떤 일이 있어도 살아남을 것이며. 나의 가정을 꾸리고 결혼을 하여 아이들과 행복하게 사는 것. 이것들이 나의 성공담이 될 것이라는 생각 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의 날이 다가왔다. 이 가족에서부터의 자유! 왠지 모르겠지만 나는 5살 반 때의 미소를 지금도 미소를 지을 수 있다.

Who knew when I put on this little jacket to head off to kindergarten that my whole life would change. Again. The parents were asked months ago by Lutheran Social Services of Minnesota, to surrender me because they would not be finalizing the adoption. The parents refused. So, after 15 months of being brutally abused by this family, I went to school and was taken immediately to the principal's office....

내가 유치원에 가려고 이 작은 외투를 걸쳤을 때 다시 한 번 내 모든 삶이 바뀌게 될 것은 누가 알았을까. 그 양부모들은 입양의 최종 승인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몇 달 전 미네소타에 있는 루터 사회 서비스로부터 나를 포기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양부모들은 거절했다. 그래서 이 가족에 의해서 잔인하게 15개월 동안 학대당한 뒤, 학교에 갔는데 곧바로 교장실로 불려갔다.

My social worker was in the principal's office on this specific day, December 1, 1972. She looked at me and showed me this picture of this family and asked me if I wanted to go live with them. I knew this was my out so I said yes immediately. I was taken to this new family right then and there and I became Kimberly Sue Anderson.

1972년 12월 1일 이 특별한 날에 나의 사회 복지사는 교장실에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이 가족의 사진을 보여주며 나에게 그 가족과 함께 살고 싶은지 물었다. 나는 이것이 나의 탈출구임을 알았고 그래서 그 즉시 그렇다고 대답했다. 나는 바로 그 가족에게로 데려가졌고 나는 킴벌리 수 앤더슨이 되었다.

At 5 1/2 years old, I had been in the United States for 15 months and still suffered from malnutrition and was the size of a two year old. But, because I finally had a family that loved me unconditionally, I was able to thrive. I have wonderful memories of doing everyday family things; family dinners, family Holiday celebrations, family outings, family trips, visiting relatives. These are the experiences that I treasured and continued with my own family. Then my parents divorced when I was 13.

5살 반의 나이에 나는 미국에 15개월 동안 있었고 여전히 영양실조로 고통 받고 있었으며 두 살 반 정도의 체격 정도였다. 하지만 나를 조건 없이 사랑해주는 가족을 만났기 때문에 나는 잘 자랄 수 있었다. 나는 가족들이 매일 하는 일들을 좋은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식사, 명절을 함께 보내기, 가족여행, 친척방문 등. 이런 것들이 내가 가족들과 함께 소중히 여기고 계속해서 지속했던 경험들 이다. 그러고 나서 13살 때 부모님은 이혼을 하셨다.

November is National Adoption Month. 

11월은 입양의 달이다.

Although my parents divorced, I was truly thankful I had a family that loved me. I always wonder about nature vs nurture when it comes to raising kids. I gained so much from my mom. She taught me how to do everyday things. No wonder I'm awesome at cooking and baking and keeping a house clean! I'm also very organized. Thanks, mom. I learned from my sister what it means to share and bond as siblings and that you always have someone to talk to no matter what. Thanks, sister. I learned from my dad to love the little things in life and to enjoy it all. I also gained his great sense of humor. That got me thru so much in my life. Thanks, dad.

부모님은 이혼하셨지만 나는 진심으로 나를 사랑해준 가족을 얻은 것에 감사했다. 나는 항상 아이를 기르는 것에 있어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에 대해 궁금했다. 나는 양어머니로부터 많은 것을 얻었다. 그녀는 모든 일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쳤다. 내가 요리와 제빵 그리고 청소를 잘한다는 건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나는 또한 굉장히 체계적이다. 고마워요 엄마. 나는 언니에게서 형제끼리 나누고 함께 결속된다는 것, 그리고 무슨 일이든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배웠다. 언니 고마워요. 나는 아빠에게 삶의 작은 것들을 사랑하고 그것들을 즐기는 것을 배웠다. 또한 대단한 유머감각도 배웠다. 그것은 나의 삶에서 많은 것들을 탈 없이 통과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고마워요 아빠. 

When I was 18 years old, my dad died. One huge regret is the time two weeks prior to my dad passing away, he contacted me to see if we could get together. I was too busy preparing for finals in my freshman year of college. I got the call two weeks later. After his funeral, I couldn't concentrate on my finals. I really didn't care. What I miss most is that my own kids never got a chance to meet my dad. He would have loved them and they would have loved him. And the really sad thing is, I don't have any pictures of my dad except for maybe two.

내가 18살 때,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한 가지 크게 후회가 되는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2주전에 우리가 함께 모였으면 좋겠다고 연락하셨는데 그때 나는 대학1학년 기말시험을 준비하느라 너무 바빠서 그 전화를 2주후에나 받았다. 아버지의 장례식후에는 기말시험에 집중할 수 없었고 아예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가장 아쉬운 것은 내 아이들이 할아버지를 만날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아이들을 몹시 사랑했을 것이고 아이들도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 슬픈 것은 내게 아마도 2장 밖에 아버지의 사진이 없다는 것이다.

Because of adoption, I was given a chance at reaching my dreams. The best was meeting the love of my life. I wasn't judged on who I 'should' marry, but rather it was my own choice. Although my future in laws questioned daily if he was still dating me all during high school. That got old! Like I wasn't good enough for him. 

입양으로 인해 나의 꿈에 다다를 기회를 얻었다. 그 중 최고는 내 삶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것 이인데 나는 결혼할 사람에게 판단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나의 선택이었다. 예비 시댁식구들은 고등학교 시절 내내 매일 매일 그와 내가 아직도 계속 사귀는지를 물어보았다. 마치 내가 그에게 충분하지 못한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Growing up together, literally, since we were 11 years old and attending the same church together; confirmed together; surviving middle school, high school, and college, we made it and got married after all of that. We were only asked questions in San Antonio, Texas about if he was in the military. He never understood why he was asked that question. I had to point out to him it was because I am Asian.

문자 그대로 우리는 함께 자랐다. 11살 때부터 같은 교회에 다니고, 세례도 함께 받고,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함께 생활하며 이 모든 것들을 함께 지나온 후 우리는 결혼했다. 우리가 텍사스의 샌안토니오에서 받은 유일한 질문은 만약 남편이 군대에 있었냐는 것이었다. 남편은 왜 그런 질문을 들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나는 그에게 내가 동양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Because I was able to marry the person I chose, I was able to create a family with him. With the birth of my two oldest kids, I finally had someone that was related to me by blood. And no I don't think about this all the time but to finally have someone that actually looked like me, now that was something! I'm so proud of these two young adults and they make me so proud to be their mom. But with the birth of these two, all the medical questions started. I have no medical history so imagine going thru life with a blank slate.

나는 내가 선택한 사람과 결혼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와 함께 가족을 꾸릴 수 있었다. 두 자녀들이 태어남으로 마침내 나와 핏줄로 연결된 누군가를 얻었다. 이것을 항상 생각하지 않던 것은 아니지만 마침내 나와 정말 닮은 누군가를 얻게 되었고 이제 그것은 삶의 큰 부분이 되었다! 나는 이 두 젊은이들이 너무 자랑스럽고 그들의 엄마라는 것이 자랑스럽다. 하지만 이 두 아이의 출생과 함께 모든 의료적 질문들은 시작되었다. 내게는 어떠한 의료 기록도 없었기 때문에 백지상태에의 삶을 통해 상상해 보았다.

With adoption, the words 'grateful' and 'lucky' come up. For me, I am Thankful for adoption. I'm Grateful for being alive. I'm Lucky I survived the abuse I endured my first 4 1/2 years of life.

입양이라 하면, '감사하는' 과 '행운'과 같은 단어들이 떠오른다. 입양해주셔서 고맙고 살아있음에 감사하다. 그리고 내 삶의 첫 4년 반 동안 학대를 견뎌내고 살아남을 수 있어서 행운이다.

Today is the actual National Adoption Day. So how fitting to write about adopting my youngest daughter! Having my two oldest children, when my son was out of diapers and I was no longer tied to a diaper bag, I was done having kids!! My kids were ages 3 and 5 and I hadn't thought of adopting this whole time. Well, God has His timing and He reminded me of me being that little 4 and 5 year old that was locked away in the bedroom on a daily basis. All I wanted was a family and I really wanted to adopt from Korea. I was pretty smart for my age, I knew what I wanted! 

오늘은 입양의 날이다. 그래서 우리 막내딸의 입양에 대해 쓰는 것이 참 잘 어울리는 날이다! 나의 두 아이를 가지고 나의 아들이 기저귀를 뗄 때쯤 나는 기저귀 가방에서 해방되었고 더 이상 애를 안 가지려고 했다! 우리 아이들이 5살, 3살이었을 때까지 입양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글쎄, 하나님은 자신의 타이밍을 가지고 계신다. 그분은 4-5 살 때 매일 방에 갇혀 있던 나를 떠오르게 하셨다. 내가 원한 것은 오직 가족이었고 나는 정말로 한국에서 해외로 입양이 되고 싶었다. 나는 어렸지만 너무나 영리하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The new year began and we started the process of adoption. That is one tough process and nothing is under your control. We got approved and now we waited. It seemed like an eternity, but a few months later, we received the call for a baby girl....enter full circle life moment for me...

새해가 시작되었고 우리는 입양 절차를 시작했다. 그것은 힘든 과정이고 어떤 과정도도 여러분이 조정하거나 관여 할 수 없다. 우리는 (입양)허가를 받았고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 시간이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지만 몇 달 후에 우리는 여자 아기라는 전화를 받았다. 나의 삶이 완전한 원을 그리며 들어가고 있었다....

When we received 'the call' for our daughter, we were on our way to go out of town so we detoured to the branch office to pick up the file and see a picture of our future daughter. We had five days to decide yes or no on this referral. As I read the background info out loud in the car, I started to cry. I realized I had not thought of my birth mother for 32 years and here I was reading about my future daughter's birth mother. And as a mother already, my heart was breaking for her. I couldn't control my tears. I could barely continue reading. Here I was, an adoptee coming full circle and adopting a little girl from Korea.

우리가 우리 딸에 대한 '그 전화'를 받았을 때, 우리는 시내 밖으로 나가는 중이어서 입양센터 지점에서 미래의 우리 딸의 사진과 서류들을 받기 위해 차를 돌렸다. 그리고 우리는 입양 여부를 결정하기 까지 5일의 시간이 있었다. 차 안에서 입양배경에 대한 정보를 크게 읽고 있는 도중에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32년 동안 나의 생모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이 서류에서 딸이 될 아이의 생모에 대해서 읽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 어머니로써 그녀에 대한 내 마음은 찢어지게 아팠다. 나는 울음을 주체할 수 없었으나 힘겹게 계속해서 읽어 나갔다. 입양된 한 사람이 한국으로부터 한 여자아이를 입양하게 되면서 하나의 원이 완성되고 있었다.

The day our daughter came home from Korea, it was about nine months from start to finish. But the process seemed to take forever! And nowadays, the process takes over two years, something I am not happy about but with two governments, it's difficult. 

우리 딸이 한국에서 집으로 오던 날까지, 시작에서부터 마칠 때까지 9달이 걸렸다. 하지만 그 (입양)과정은 영원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그 과정이 2년이 넘게 걸리며, 나는 두 나라의 정부가 불만스럽지만 그 절차가 까다롭다.

The day of our daughter's arrival, we had to drive 2 1/2 hours to the airport in Iowa. We took the kids out of school early to share lunch with them before heading out. At the airport, we had three families total waiting along with other family members. The flight was delayed. My heart sank. Flight delayed again. Now it's just getting annoying. So everyone decided to go to dinner. Really, eat at a time like this?? Ok, but let's hurry was all I could think. I had a few bites to eat, I was way too nervous. 

우리 딸이 도착한 날 우리는 아이오와의 공항까지 2시간 반을 운전해서 가야 했다. 우리는 아이들을 학교에서 일찍 데려와 출발 전에 점심을 같이 먹었다. 공항에서 다른 가족들과 함께 총 세 식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비행기는 연착 되었다. 내 심장이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비행기가 또 다시 연착되었다. 이제 점점 애가 탔다. 그런데 모두가 저녁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정말? 이런 시간에 먹는다고?? 의문이 들었지만, 좋아, 하지만 서두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방법이라 생각했다. 식사를 하며 몇 입 먹지 않았지만 이내 매우 초조해졌다.

Back at the airport and after paper airplanes and paper footballs and races up and down the terminal, the plane was finally arriving!!
Kora was the only girl, so it was kind of easy picking her out. And of course seeing her and holding her, I couldn't stop crying. This picture was her on arrival day (left). She was two days shy of four months old.

공항으로 돌아가서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리고, 종이를 구겨 공을 만들어서 축구를 했다가 터미널을 오르락내리락 달리기 경주를 하며 기다리는데 마침내 비행기가 도착했다!!!

코라가 아이들 중 유일한 여자아이였기 때문에 코라를 찾는 건 좀 쉬웠다. 물론 그녀를 보고 안으면서 나는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이 사진은 그녀가 도착했던 날이다. (왼쪽) 4개월에 이틀이 모자란 나이였다.

So many times I have heard people say they don't think they could love a child that was not born to them. I have two birth kids and one adopted and I love all three the same. I've heard that we adoptees were ripped away from our birth country. For myself, I don't want to live in a country where I don't get a fair chance at living a decent life. I've heard that adoptees didn't have a choice to be adopted. My two birth kids didn't have a choice to be born to me either. Families nowadays are created and made up in many different ways. How can I not love this cute little peanut as my own?! My daughter at a year old (right).

사람들이 자기가 낳지 않은 아이를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말을 무척 많이 들었다. 나는 두 명의 아이들이 있었고 한 명은 입양했고 나는 셋 모두를 똑같이 사랑한다. 나는 우리 입양인들이 우리의 고국으로부터 버려졌다는 말을 들었는데 나로선 온전한 삶을 살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나라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

그리고 입양인들이 입양 되는 것을 선택을 할 수 없었다고 하는 말을 들었는데 내가 낳은 두 자녀도 역시 나의 자녀로 태어날 것을 선택 할 수 없었다. 요즘 시대의 가족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구성된다. 어떻게 내가 이 귀여운 작은 땅콩 같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1살 때의 나의 딸 사진이다. (우측)

In my own journey of adoption, I made my very first trip back to Korea in 2005. I was 38 years old. I didn't know a single person that was going and I didn't do any research on Korea. I was asked if I wanted to go and I was there three weeks later.

나의 입양 여정에서 2005년에 한국으로의 첫 여행을 했다. 38살이었는데 나는 단 한 사람도 몰랐고 한국에 대해 어떤 조사도 하지 않았다. 한국에 가고 싶은지 물어보았고 그곳에 3주 뒤에 갔다. 

The week I was in Korea was overwhelming yet exhilarating. It changed my whole outlook on the world, but most importantly, I changed how I looked at myself. I was finally proud to be Korean. And to top off my very first trip, I escorted a baby home to the U.S. to his family.

한국에 있던 주간은 여러 감정에 휩싸였지만 아주 신났다. 세상을 보는 관점을 바꿔주었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스스로를 보는 방식을 바꾸었다는 점이다. 나는 마침내 한국인 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나의 첫 번째 여행에서 나는 한 아기를 미국에 있는 그의 가정까지 인도했다.

After my first trip to Korea, I went back two more times within an 8 month period. My third trip was the motherland tour which is solely for adoptees 18 and older. Prior to this trip, adoptees can request their file from Holt and one does not have to be adopted thru Holt to facilitate such a request. When I received my file, my last name of H-a-n-s-e-n was written on the front but this time, it also had the father's name included. This was the first time I knew the father's name. This was my first family. I googled the name and up popped a website to match names and addresses. In 2006, I didn't have to pay for use of such information findings as you do today. 
The name suggested several people related so I went thru the task of inputting those names they all matched each other. I also had an address and phone number so why not try and see if these people knew my family? They were listed as ages 80 and 81. A long shot but I was willing to try. 

한국으로의 첫 여행 후에 나는 8개월 안에 두 번 더 방문했다. 나의 세 번째 여행은 18세 이상의 입양인들을 위한 단독 고국방문여행이었다. 이 여행 전에 입양인들은 홀트 아동복지회에 그들의 기록을 요청할 수 있었고 홀트를 통해 입양되지 않은 사람들도 편리하게 그런 정보를 요청할 수 있도록 했다. 내가 파일을 받았을 때, HANSEN이라는 가족 이름이 앞에 씌어 있었지만 이번엔 아버지의 이름도 함께 쓰여 있었다. 이게 나의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된 처음이었다. 나의 첫 가족이었던 것이다. 나는 인터넷에서 그 이름을 찾아보았고 그 이름과 주소가 똑같은 웹사이트가 나왔다. 2006년에, 여러분이 이런 정보를 가지고 사람을 찾는 것처럼 돈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 이름은 연관된 몇몇 사람들을 제시했는데 나는 그 이름과 서로 맞는 사람들을 살펴보는 작업을 했다. 나는 주소와 전화번호도 가지고 있었는데 만약에 이 사람들이 나의 가족을 알고 있다면 전화하고 찾아가보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그 사람들은 80세와 81세로 명단에 되어있었다. 가망성은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시도해보았다.

I dialed the number. A woman answered. I must have recognized the voice because immediately I asked her, ' Did you adopt a little girl from Korea in 1971?' She answered, 'Yes'. Then I asked, 'Did you have to give her up in 1972?' She answered, 'Yes'. I then proceeded to tell her, ' I think I'm that little girl'. I told her I was adopted by another family in Minnesota. She and her husband thought I had been sent back to Korea because they were never informed of the day the agency took me from school until after I was safe in my new family later that day. I told her all I ever wanted to do was to thank her and her husband for adopting me because they were the ones responsible for getting me to the United States. And because of that, I was now leading a very successful life with my husband and three kids. Her response, 'Yes, we did do that.'

그 전화번호를 눌렀다. 한 여성이 받았다. 나는 분명히 그 목소리를 알아챘기 때문에 즉시 그녀에게 "1971년에 한국에서 딸아이를 입양하셨죠?" 라고 물었고 그녀는 "예"라고 답했다. 그리고 나서 "1972년에 그 아이를 포기하셨죠?"라고 물었는데 그녀는 또 "예"라고 답했다. 나는 그리고 계속해서 그녀에게 말했다. "제 생각엔 그 아이가 저인 것 같네요" 나는 그녀에게 미네소타의 또 다른 가족에게 입양되었다고 말해주었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입양기관에서 나를 데려가고 새로운 가정에서 안전할 때까지 어떤 소식도 듣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한국으로 돌려보내졌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내가 그녀와 남편에게 나를 입양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이 내가 미국으로 올 수 있도록 한 부분을 맡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지금 남편과 세 아이와 함께 만족스런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맞아요 우리가 그렇게 했어요." 라고 답을 했다.

The conversation with the first mother continued and she proceeded to tell me that her sister lives in Blair. That is about 25 miles from where I currently live. I told her to let her husband know I was fine if he ever wondered about me. I barely remember him. I also told her that if my siblings wanted my contact info that I would be more than willing to give that to them. I had four siblings, three were adopted domestically. She then proceeded to tell me she still had pictures of me and that she should send them to me. I told her I would love that. I have continued to send them a Christmas card every year. I have not heard one word back. Not that I was expecting to.

첫 번째 어머니와의 대화는 계속되었고 그녀는 그녀의 언니가 블레어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곳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40km 쯤 떨어진 곳이다. 나는 그녀에게 그 분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지만, 만약에 남편이 나에 대해 궁금해 했다면 내가 잘 지냈다고 안부를 전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만약 내 형제들이 나의 연락처를 알고 싶어 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4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셋은 국내로 입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가 아직도 내 사진을 가지고 있는데 나에게 돌려주겠다고 해서 그렇게 해주시면 너무 좋겠다고 답했다. 나는 그 분들께 매년마다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내고 있다. 기대하지도 않지만 어떤 말도 답장도 돌아온 적이 없다.

In 2009, I was able to take my entire family to Korea. While we were there, my youngest daughter was able to meet her foster parents. They had loved on her for around three months. A few years later, I was able to take my daughter back to Korea because her foster mother was retiring from fostering children. I can't tell you how special these foster parents are. They truly love our kids and I've witnessed them reuniting with their kids and recognize them instantly. Makes me cry every time! We were able to give my daughter's foster mother a bracelet that matched the ones we had (left). We have this same bracelet for my daughter's birth mother if she reunites with her someday.

2009년, 모든 가족들을 데리고 한국에 갈 수 있었다. 우리가 거기 있는 동안 우리 막내딸은 위탁부모를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3개월 동안 그녀를 사랑으로 보살펴 주었다. 몇 년 후는, 그 위탁모께서 아이들 돌보는 일을 그만하신다고 하셔서 막내딸을 한국으로 데려갔다. 그 위탁가정이 얼마나 잘해주셨는지 말로 할 수 없다. 그분들은 우리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해주셨고 나는 그분들이 맡았던 아이들과 다시 만날 때 그 아이들을 바로 알아보는 것을 목격했다. 매번 나를 울게 만들었다! 딸의 위탁모에게 우리가 가진 것과 (왼쪽)같은 팔찌를 줄 수 있었다. 우리는 언젠가 딸아이가 생모와 만나면 주기 위해 같은 팔찌를 하나 더 가지고 있다.

This summer, my daughter will be 18 and be of legal age to do her birth search. I wish her well in her search as it's not always easy for us adoptees in this process. The Korean government has now established a central agency for those wishing to do a search. I feel this has not made it easier and is even more frustrating for us. There are some that don't agree with intercountry adoption, but for us, adopting our daughter was how we wanted to add to our family. We have a little information about my daughter's birth mother and if you think my daughter would have been better off with her birth mother over me, that is your opinion. Staying in Korea, they would have been struggling with life's basic needs besides living with the stigma of being born to a single mother and being looked down upon. That's not living. Love and one's own culture does not conquer all. 

이번 여름에 우리 딸은 18살이 되고 출생기록을 조회할 수 있는 법적 나이가 된다. 입양인들에게 이 과정이 쉽지 않기 때문에 우리 딸이 잘 해내기를 바란다. 현재 한국정부는 그런 조사를 원하는 입양인들을 위해 중앙기관을 세웠다. 나는 이 기관이 절차를 쉽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어렵게 만드는 것 같아 실망스럽다. 더러는 해외입양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지만 딸을 입양한 것은 우리가 원하는, 가족 한 사람을 더 얻는 것을 방법이었다.

우리는 딸아이의 생모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고, 만약 당신이 우리 딸이 생모와 함께 지냈다면 더 잘 지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단지 당신의 의견일 뿐이다. 한국에서 지낸다는 것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힘들게 싸웠어야 하고 미혼모에게서 태어났다는 오명과 멸시 속에 살았어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삶이 아니다. 사랑과 한 사람이 가진 문화가 모든 것을 결정할 수는 없다.

 

Kora at age 18

We aren't the perfect family but we have always focused on our family first. We have strived to create a life and memories for them. It hasn't always been easy, but life isn't easy. Love and America doesn't conquer all but at least all my kids can and will have the opportunity to be what they want to be. Because in America, ANYone can achieve success.

우리는 완벽한 가족은 아니지만 언제나 가족에 우선을 둔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좋은)삶과 추억들을 갖게 하려고 노력한다. 언제나 쉽지는 않았지만, 삶이 어디 쉬운 것인가. 사랑과 미국이라는 나라가 모든 것을 결정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우리 아이들은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이 될 기회를 가질 수 있고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미국에서는 '누구나'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I write about my adoption journey because it's my story to tell. I choose to share my story in hopes that people will look at their lives differently, no matter who you are. 

나의 이야기를 말하고자 하기에 때문에 나의 입양의 여정을 쓴다. 당신이 누구든지 간에,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기를 바라는 희망을 담아 나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선택했다.

Adoptive parents, please remember that when it comes to your kids. Let them tell their story if they so choose. You can share from your point of view but anything personal is not yours to tell. There are people that are against intercountry adoption. I share my story to show that adoption can go wrong but also that adoption can work. These situations also occur in birth families. Life is hard and life is unfair, but we are the ones in control of our own happiness. 

양부모들은 이것을 꼭 기억하면 좋겠다. 아이들이 스스로 자기의 이야기를 말하고자 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해주어라. 당신의 관점을 나눌 수는 있지만 개인적인 것은 그 어떤 것도 당신이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해외입양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입양이 나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좋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내 이야기를 나눈다. 이러한 상황들은 친 가족 안에서도 생긴다. 삶은 만만한 것도 아니고 공평하지 않지만 오직 우리만이 우리의 행복을 주관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Just because I believe adoption can work does not mean I don't believe in family preservation. I try to help those within their countries stay intact and I continue to support them. I have also spoken to many unwed mothers and have heard their stories of isolation. I am about helping these mothers be free to have choices, not create roadblocks to their future. And I have played with plenty of orphans yearly and some year after year which breaks my heart. No matter what, they are the innocent ones and deserve a family.

단지 내가 입양이 성공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족을 유지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그들의 나라에서 온전하게 지내도록 도우려고 하고 계속해서 그들을 후원하고 있다. 또 많은 미혼모들에게 말하고 그들의 소외된 이야기를 들었다. 이 엄마들의 미래에 장애물을 만들지 않고 자유로운 선택을 하도록 도우려 하고 있다. 그리고 매년 수많은 고아들과 함께하고 있는데 몇몇 아이들은 해마다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어떤 상황에서든 그들은 순수한 아이들이고 가족을 가질 자격이 있다. 

Families are created and made in so many different ways, lets not judge one another.


가족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기에, 서로 판단하지 말아주십시오.

Thank you for reading my story.

저의 이야기를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Kimberly's Story in Korean from an interview done while in Korea: Posted September 2016

https://storyfunding.daum.net/episode/120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