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ces’ Story: An Orphan’s Story in Korea

그레이스의 이야기 : 한국 고아의 이야기

I really wish I knew when I was born and what my birth name was. I wonder where I was born and what my parents looked like. These thoughts have been deeply embedded in my heart and can’t seem to brush these thoughts off of my head. My English name is Grace. I asked Grandma (my orphanage director) what “grace” meant and she explained that when I was a baby, I was sick a lot and went to the hospital often, and that I was so thin despite eating food, so as she prayed to God she thought of this name for me. 

나는 내가 언제 태어났고 내 이름이 무엇이었지 정말 알고 싶었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부모님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다. 이런 생각들은 내 마음속에 깊이 박혀 있었고 내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는 듯 보였다. 나의 영어 이름은 그레이스이다. 할머니에게(보육원장님) “그레이스”의 뜻이 무엇인지 물어보았었다. 할머니는 내가 아기였을 때 음식을 먹어도 아주 말랐고, 많이 아파서 병원에 자주 갔기 때문에 그녀는 하나님께 기도를 했는데 나를 위한 이 이름이 떠올랐다고 하셨다.

I was told that Grandma moved 28 children from Busan to Soo­pul­won (the name of the Isabell Orphanage) in the province of Kwung­Gi­Do. Grandma protected us and devoted her love through her faith, her unforgettable love, which I miss greatly. When foreigners visited us occasionally, at least we were able to have treats, even though the treats did not fill us, and they also brought presents and pretty clothes for us to wear. These were the happiest days for us. Therefore, we counted down the days to foreigners’ visits. When Grandma was with us, we were happy, and we could even have snacks without feeling nervousness. (Editor note: “Grandma” Janet Whang, was not always present as she was raising funds to support the orphanage.”)

할머니가 부산에서 경기도 지역에 있는 수풀원(이자벨 보육원 이름)으로 28명의 아이들을 데려오셨다고 들었다. 할머니는 우리를 보호하셨고 신앙을 통해 사랑으로 헌신하셨는데 그분의 잊을 수 없는 사랑이 무척 그립다. 이따금씩 외국인들이 종종 방문할 때면 우리는 충분히 만족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우리에겐 특별한 것들을 가질 수 있었고 선물과 우리들이 입을 수 있는 예쁜 옷도 가져왔다. 이 때가 우리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외국인들이 방문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할머니가 우리와 함께 있을 때 우리는 행복했고 우리는 과자를 먹어도 초조함 없이 먹을 수 있었다. (편집자 주: “할머니” 자넷 황씨는 보육원 후원기금을 모아야 해서 항상 함께 있던 것은 아니었다.)

Instead of having wonderful childhood memories, I really do not care to remember the hard times living with the sorrow of corporal punishment and loneliness. As I reflect on my past, this reminds me of my painful past. I lived in an orphanage along with 26 sisters until I graduated from middle school. Out of 28 sisters, two were sent to a different institution when they were young. 

어릴 적 좋았던 경험들 외에는 신체적 체벌과 외로움으로 슬퍼했던 어려운 시절을 기억하고 싶지 않다. 과거를 돌아보면, 고통스러웠던 지난날이 떠오른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26명의 보육원 동기들과 함께 고아원에서 살았다. 28명중에 2명은 그들이 어렸을 때 다른 시설로 보내졌다.

As a child, I dreamed of becoming an English teacher. I wanted to study hard so I could achieve my dream of becoming a teacher. But my orphanage made my dream impossible. Whenever we came home from school, we could not have supper until we finished our chores, such as weeding, feeding animals, kitchen duties, and house work. Starvation was a regular part of our lives, and I dreamed of one day eating until I was full.

어린아이일 때 나는 영어 선생님을 꿈꿨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었고 그래서 선생님의 꿈을 이루고 싶었다. 하지만 보육원이 내 꿈을 불가능하게 했다. 학교에서 돌아올 때면, 풀 뽑기나 동물들 먹이주기, 부엌 일 집안일 같은 허드렛일을 끝낼 때까지 저녁을 먹을 수 없었다. 굶는 것은 우리 삶에서 일상적인 부분이었고, 언젠가는 배가 부를 때 까지 먹을 수 있기를 꿈꿨다.

My years in elementary and middle school, which I detest to remember, were filled with fear and trepidation [at the orphanage]. At least I always looked forward to school days. It was so nice because meeting teachers, playing with my friends without fear, and being able to study allowed me to forget my orphanage life for a short time. However, when it was the last period of school, my heart would start to pound out of fear, and my feet would be very heavy going home. When I got close to home, I did not want to go in, and I am sure that all of us felt this way.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던 때는 기억하기도 싫은 때인데 겁에 질려 있었고 공포로 가득했다. 하다못해 나는 언제나 보육원보다 학교생활을 더 바랐다. 선생님을 만나고 두려움 없이 친구들과 함께 놀고 잠깐이라도 고아원에서의 삶을 잊고 공부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좋았다. 하지만 학교에서 마지막 시간일 때가되면 내 심장은 겁에 질려 뛰기 시작했고 집(보육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집에 가까워지면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는데 우리들 모두 이런 심정 이였을 거라고 확신한다.

Despite the couple, who were our caretakers, they taught us to live in fear, and I wish not to think of them because they were not nice people. When Grandma was around, they pretended to be nice to us, but when she was out of sight, they turned evil, and would beat us with thick sticks and punish all of us. Every week we attended church and listened to the pastor’s sermon, but rather than praising, I earnestly prayed that this bad couple would be gone quickly from our orphanage. My sad childhood continued as we continued to live in constant fear to the point I even wanted to run away from the orphanage. Whether it was at the church or in the orphanage, because of this couple, I think we were hungry for happiness. 

양육자 부부가 있어서 우리에게 공포 속에 지내는 법을 가르치긴 했지만 좋은 사람들이 아니어서 기억하고 싶지는 않다. 할머니가 계실 때에는 우리에게 잘 대해주는 척 했지만 할머니가 안보이실 때면 악마로 변했고 두꺼운 막대기로 우리를 때리고 벌을 주곤 했다. 매주 우리는 교회에 가서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지만, 찬양하기 보다는 이 나쁜 부부가 보육원에서 사라지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보육원을 탈출하고 싶을 만큼의 끊임없는 공포가 계속 될 때까지 나의 슬픈 어린 시절은 이어졌다. 교회건 보육원에서건 이 부부 때문에 우리는 행복에 굶주렸다.

Only a couple of girls attended high school and the rest of the girls were forced to leave the orphanage as soon as they finished middle school. How to find a job was a concern. Some girls were sent to work for families as live in maids, and some were sent to live in factory dormitories. I was sent to a clothing factory instead of to a family. They made us work all day without feeding us. One day, I was so hungry that at four in the morning, I ran away to go back to my orphanage, but when I got to the orphanage, [the caretaker couple] seeing what I did, they started screaming at me and started to hit me and told me haphazardly to leave. 

오직 몇 명의 여자동기들만이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였고 나머지는 중학교를 마치자마자 보육원을 떠나도록 강요 받았다. 직업을 구하는 것이 큰 걱정이었다. 몇몇은 가정집에 식모로 보내졌고, 몇몇은 공장으로 보내졌다. 나는 가정대신에 의류 공장으로 보내졌다. 공장에서는 우리에게 식사도 주지 않고 하루 종일 일을 시켰다. 어느 날, 나는 너무 배고파서 새벽 네 시에 일어나, 보육원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보육원에 도착했을 때, [그 양육자 부부가] 내가 온 것을 보고는, 나에게 소리 지르고 때리며 되는대로 빨리 떠나라고 했다.

Realizing I had no place to go, and having to face such harsh circumstances made me mad at myself, and the sadness and loneliness continued. My sisters did not receive any support from the government nor organizations and they had to live in the world completely broke.

갈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이 어려운 상황을 겪어야만 한다는 것은 나를 미치게 했다. 슬픔과 외로움은 계속되었다. 나의 동기들은 정부나 기관에서 어떤 후원도 받지 못했고 그들은 무일푼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했다.

At the end, I went to work for a family. I was very lucky because my master treated me well. I had room and board, and I earned money. I also began high school through radio broadcast high school. During the week I would study by listening on the radio, and on the weekend, I attended classes. My employers paid for two years of my high school education. They were genuinely faithful people. As I write this, I feel appreciation toward them for their hospitality and warm hearts. 

끝내는 나도 가사 도우미로 일하러 갔다. 나는 행운아였다. 주인이 잘 대해 주었기 때문이다. 숙식과 함께 돈도 벌었다. 방송통신고등학교도 다니기 시작했다. 주중에는 라디오를 들으며 공부하고 주말에는 수업에 참석했다. 2년 동안의 학비를 내주었다. 그 분들은 정말 신실한 사람들이었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그분들의 환대와 따뜻한 마음에 다시 한번 감사함을 느낀다.

When my orphanage sisters would visit me, my employer would tell me that they were welcome in their house. I especially remember when Julie visited me often, and that made me happy. Even though I did not have much to offer, I made an effort to show her my hospitality. During my third year with this family, our grandmother (director) passed away early in the morning. Before she passed away, there was a talk that she wanted us to get together because she had something to tell us, and that she was going to adopt us all. But her sudden death and timing of it made us suspicious. 

보육원 동기들이 나를 방문할 때, 집주인은 내게 그들을 환영한다고 했다. 특히, 줄리가 자주 방문했던 기억이 나고 그녀의 방문은 나를 행복하게 해주었다. 내가 많은 것을 줄 수는 없었지만, 잘 대해주려고 노력했다. 이 가정에서 3년을 일하는 동안 우리 할머니(보육원장)는 어느 날 아침에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우리에게 하실 말씀이 있어서 우리가 모이길 바라셨으며 그녀의 말씀은 우리 모두를 입양 보내실 거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갑작스런 죽음과 그 타이밍은 우리로 하여금 의심이 생기게 했다.

Anyway, after working for the family for four years, I left them for a change in my life. So I began working at a factory where they had a dormitory, and I finished my third year of high school in 1988. My factory’s daily schedule, which ran three shifts, gave me enough free time, so it was so nice to take English classes and learned many other things. And I also conversed with coworkers and soon the constant fear I had developed during my orphanage disappeared. I was very happy. 
At the factory, I met my future husband through dating, and we were married in 1989, when I was 26 years old. My married life was neither happy, nor unhappy. My husband lost his job due to a fire at his company, and I could not work because I had a child. It was a very difficult time. During this time, my previous boss, who I worked for when I was single, visited our apartment, and he offered both of us a job at his company. I went to work every day, and I would leave my three year old child at the child care center. My daughter would start crying not wanting to leave me when I was getting ready to go to work in the morning, but I had no choice. Even though it hurt my heart bad, my daughter finally adjusted to going to preschool, and I was so thankful that her adjustment was helping me out. 

어쨌든, 4년을 그 가정에서 일하고 나서, 내 삶을 바꾸기 위해 나는 그곳을 떠났다. 이후에 나는 기숙사가 있는 공장에서 일했고 1988년에 고등학교 3년을 마쳤다. 공장의 스케줄은 3교대였고, 충분한 개인 시간이 있어서 영어 수업을 듣고 다른 많은 것들을 배우기에도 좋았다.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보육원시절부터 끊임없이 커져갔던 공포는 곧 사라졌고 나는 너무 행복했다. 공장에서 미래의 남편을 만나 데이트를 하고 26살이던 1989년에 우리는 결혼했다. 결혼생활은 행복하지도 안 행복하지도 않았다. 한때 남편은 회사에서 해고당하고 나는 아이가 있어서 일을 할 수 없었다. 힘들었던 시기였다. 이 기간에, 결혼 전에 일했던 곳의 사장이 우리 아파트에 와서 그의 회사에서 우리 둘 다 일하라고 했다. 나는 매일 일하러 가서 세 살 된 아들을 어린이 집에 맡겨야만 했다. 내 딸은 아침에 내가 일하러 갈 준비를 할 때마다 나랑 떨어지기 싫어서 울곤 했다. 하지만 다른 선택이 없었다. 마음이 너무 아팠지만, 딸은 마침내 유치원 가는 것에 적응했고 그렇게 나를 도와줘서 너무 감사했다.

While we were working at the factory, we were received another blessing. I happened to be reading a newspaper and the word “apartment” caught my eye, with a description fit for us! However, I only had two days to gather up all the necessary documents. It was very difficult to work full time and complete these documents on time. So I talked to my boss, and surprisingly, he agreed to give me two days off. I shed tears of appreciation. 

우리가 공장에서 일하는 동안, 또 다른 축복을 받았다. 신문을 보는데 “아파트”라는 단어가 보였고 조건이 딱 맞았다! 그러나 모든 서류를 준비하는데 시간이 이틀 밖에 없었다. 정규직으로 일하면서 이 서류들을 제 시간에 준비하기란 너무나 어려워서 사장에게 말했는데 너무 놀랍게도 이틀간 휴가를 주었다. 감사의 눈물이 흘렀다.

Suddenly, I remembered this phrase from, “The Sound of Music:” “When the Lord closes a door, somewhere He opens a window.” Knowing how desperately we wanted to have our own apartment, God truly answered my prayers. Having grown up with a harsh childhood, and having to stay at my dorm during holidays because I had no place to go was the reason I wanted this apartment all the more.

갑자기, 사운드 오브 뮤직의 이 대사가 생각났다. “하나님은 한쪽 문을 닫으실 때, 어딘가에 창문을 열어두신다” 얼마나 필사적으로 아파트를 갖고 싶어 했는가를 아시는지 하나님께서는 정말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가혹했던 어린 시절과 명절에도 지낼 곳이 없었던 것이 이 아파트를 더욱 원했던 이유였다.

It required us to eat less and save money to obtain our own place to live. First, I was given an opportunity to work; second, I was given the opportunity to buy an apartment; third, my boss gave me an opportunity to earn extra money. As a side job, my boss allowed me to take extra materials from the factory to my home, so I could work on the sewing machine embroidering flower patterns. They were not hard. In fact, embroidering with the sewing machine was a lot of fun. Not only that, this helped me to build additional skills and experience. All this allowed me to pay for my apartment. Because he understood me, he provided us with many great opportunities to achieve many things. 

우리는 집을 얻기 위해 덜 먹고 돈도 모아야 했다. 첫째는, 일할 직장이 있었다. 둘째는, 아파트를 살 기회가 주어졌다. 셋째는, 사장이 추가로 돈을 더 벌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사장은 부업으로 여분의 일감을 집으로 가져가 일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 재봉틀로 꽃모양 수를 놓는 일이었는데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재봉질은 무척 재미있다. 그 뿐만 아니라, 이것은 추가적으로 기술과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 모든 것이 아파트 대금을 치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사장님이 나를 이해해주었기 때문에 많은 것들을 이룰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다.

My apartment was small but was plenty for three of us to live in. My daughter grew up in this apartment until she graduated from college. My orphanage sisters frequently visited my apartment. When my daughter was eight years old, her friends asked why she had so many aunts. Only then I explained to her the story of my childhood. She finally learned my childhood circumstance. Ever since then, my daughter was comfortable being around my orphanage sisters. 
My sisters and their husbands visited my apartment frequently. Even though my apartment was small, I enjoyed seeing their many faces. My daughter grew healthy and beautiful. Her college was not prestigious, but we helped her with tuition her first year of college, and was able to maintain a scholarship for the remainder of three years. She started her job two years ago as a personal trainer.

나의 아파트는 작았지만 우리 세 식구가 살기에는 충분했다. 우리 딸은 이 아파트에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자랐고 보육원 동기들은 자주 우리 집에 방문했다. 우리 딸이 8살이었을 때, 한번은 딸의 친구들이 이모들이 왜 이렇게 많냐고 물어보았다. 그때야 비로소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딸에게 말 해 주었으며 딸은 마침내 나의 어린 시절 상황들을 알았다. 그 때 이후로, 우리 딸은 나의 보육원 동기들과 함께 있는 것을 편하게 여겼다. 나의 동기들과 남편들은 우리 집에 자주 왔다. 아파트가 작았지만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즐거웠다. 우리 딸은 건강하고 아름답게 자라났다. 그리고 유명한 대학교는 아니지만 우리는 딸의 처음 1년 학비를 도왔고 나머지 3년은 장학금을 받으며 다닐 수 있었다. 딸은 2년 전에 개인 트레이너로 일을 시작했다.

 Currently, we all live apart. Because my husband’s job is far away, he only comes home on the weekend, and my daughter has lived on her own since her graduation. I wish she would visit more often so I would not be so lonely, but she seldom comes home. Even though I understand her busy schedule, not having a close knit family makes me feel both lonely and empty. Right now, I am unemployed. I try to keep myself busy by doing things here and there. I try to practice making clothes and purses. Honestly, I am in preparation to learn sewing skills at an institution although I do not know when this will happen, but I want to do as much as I can so one day, I can open my own tailoring shop. 

현재 우리는 따로 지내고 있다. 남편의 직장이 멀어서 주말에만 집에 오고, 딸은 졸업 하고 독립했다. 딸이 자주 오면 덜 외로울 텐데 좀처럼 잘 오지 않는다. 딸이 바쁜 건 이해하지만 가까운 가족과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이 나를 외롭고 공허하게 한다. 지금은 직장이 없지만 이것저것 하면서 바쁘게 지내려 하고 있다. 옷이나 지갑 만드는 연습을 한다. 솔직히, 이런 일들이 벌어질 것은 모르고 학원에서 재봉기술을 배웠지만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일을 하고 싶고 언젠가, 나의 양복점을 열고 싶다.

After I got married, the saddest thing was when I was asked why I did not have parents. About ten years ago. I was trying to make friends, so I opened my heart by sharing my past, and instead, word went around the factory that I was an orphan. This caused me to lose my job. I was devastated, so I went to church, but even in the small group, one person made derogatory comments about me. I was so angry.

결혼하고 나서 가장 슬펐던 것은 왜 부모님이 없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였다. 10년 전쯤, 친구들을 만들기 위해 마음을 열고 과거를 이야기 했지만 대신에 내가 고아라는 말이 공장에 떠돌았다. 이것 때문에 직장을 잃었다. 너무 절망스러워서 교회에 갔다. 하지만 이 소그룹에서도 조차 어떤 사람이 나에 대한 모욕적인 말들을 만들어냈다. 진심으로 너무나 화가 났다.

Since then, I have not stepped into a church. I hated people so much that I wanted to leave Korea. Ever since then, I have not been able to open my heart to anyone. I want to free my heart and explore the world.

그 때 이후로, 나는 교회에 가지 않고 있으며 한국을 떠나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한 사람들이 미웠다. 그 이후 나는 누구에게도 내 마음을 열 수 없었다. 이제는 마음을 자유롭게 하고 세상을 여행하고 싶다.

I want to meet friends, share conversation, travel freely, and I want to change my destiny. I want so desperately to meet a friend who truly understands my life. 

친구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자유롭게 여행하며 내 운명을 바꾸고 싶다. 내 삶을 진심으로 이해해주는 친구를 만나고 싶다.